조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의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는 중세 영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다양한 계층의 순례자들이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단순한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정치, 종교, 경제, 문화적 현실을 반영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24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이야기는 순례자들의 신분과 성격을 반영하면서도 중세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성직자들의 부패, 봉건 사회의 모순, 신흥 중산층의 부상, 여성의 역할 변화 등이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 이 글에서는 《캔터베리 이야기》가 중세 영국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1. 《캔터베리 이야기》의 구조와 특징
(1) 이야기 속 이야기 구조 (프레임 내러티브)
《캔터베리 이야기》는 29명의 순례자들이 런던에서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가는 여정을 함께하며 각자 한두 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처럼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 속에 포함되는 구조를 프레임 내러티브(frame narrative) 라고 한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중세 유럽 문학에서 종종 사용되었으며, 초서는 이를 통해 한 작품 안에서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가진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드러내도록 했다.
(2) 중세 영어의 확립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를 당시 흔히 사용되던 라틴어나 프랑스어가 아닌 중세 영어(Middle English) 로 집필했다. 이는 당시까지 문학과 학문의 주요 언어였던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어를 문학의 중심 언어로 자리 잡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중세 영국 사회의 반영
(1) 봉건제도의 변화와 신흥 계층의 부상
14세기 영국 사회는 봉건제도가 점차 쇠퇴하고 상업과 무역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사회 계층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이러한 사회 변화를 반영하여 다양한 신분의 등장인물을 배치하고 있다.
- 기사(The Knight): 전통적인 봉건 영주의 모습을 보여주며, 명예와 충성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 상인(The Merchant): 중세 후반 상업 경제가 성장하면서 등장한 신흥 계층을 대표한다. 그는 사업에 대한 관심이 많고, 돈과 거래에 능숙한 인물로 묘사된다.
- 서기(The Clerk):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는 가난한 학자로, 학문을 중요시하는 계층의 일원이다.
이처럼 작품은 중세 사회가 단순한 봉건적 신분제에서 점차 다양한 계층이 공존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성직자들의 부패와 종교적 타락
14세기 영국은 성직자들의 부패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초서는 이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며 당시 교회의 타락을 강하게 비판했다.
- 수도원장(The Prioress): 외형적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귀족적인 태도를 보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긴다. 이는 성직자들이 본래의 신앙적 역할을 잊고 세속적 욕망에 빠졌음을 암시한다.
- 수사(The Friar): 원래는 가난한 자들을 돕고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받고 용서를 파는 부패한 성직자로 묘사된다.
- 면죄부 판매원(The Pardoner): 돈을 받고 죄를 사해 주는 ‘면죄부’를 파는 인물로, 교회의 부패를 극단적으로 상징한다.
이러한 인물들은 당시 교회의 문제를 풍자적으로 드러내면서 중세 후기 종교 개혁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3) 여성의 역할과 사회적 위치 변화
중세 사회에서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으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다양하게 그려진다. 특히 바스의 아내(The Wife of Bath) 는 기존의 여성관을 뒤흔드는 독특한 캐릭터다.
- 바스의 아내는 다섯 번 결혼한 경험이 있는 여성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주장을 펼친다.
- 그녀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 결혼 생활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하며, 당대 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에 도전한다.
바스의 아내는 중세 후기 여성의 역할 변화와 보다 독립적인 여성상이 등장하는 흐름을 반영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4) 페스트와 사회적 불안
14세기 영국은 흑사병(페스트)으로 인해 사회 구조가 급변한 시기였다. 페스트로 인해 많은 농노와 하층민이 사망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졌고, 이로 인해 농노들이 보다 나은 조건을 요구하며 기존 봉건 질서가 흔들렸다.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는 이런 사회적 불안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신분의 등장인물을 통해 기존 봉건제가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하층민 출신의 일부 인물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들은 사회적 계층 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론
조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14세기 영국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담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기록물이다.
- 봉건 사회의 변화: 전통적인 기사 계급뿐만 아니라 상인, 학자, 농민 등 다양한 신분이 등장하며 신흥 계층의 부상을 보여준다.
- 종교적 부패: 타락한 성직자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며 당시 교회의 문제를 지적한다.
- 여성의 사회적 역할 변화: 바스의 아내와 같은 강한 여성 캐릭터를 통해 전통적 여성관에 도전한다.
- 페스트 이후의 사회 변화: 하층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상승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결국, 《캔터베리 이야기》는 중세 영국 사회의 축소판이자,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포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초서는 유머와 풍자를 통해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중세 말기 사회의 복잡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러한 점에서 《캔터베리 이야기》는 단순한 고전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